[삶의 뜨락에서] 당신은 효자입니다
졸업을 앞두고 나는 이제까지 써온 신학대학원 졸업 논문의 교정을 받으려고 미스터 깁슨을 만나러 가야 했다. 그는 30대 후반 미국인으로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신학박사 과정을 이제 마-악 끝낸 석학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국어가 아닌 영어로 졸업 논문을 쓰는 일이 그냥 내게 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되어 도전해 본 것이다. 우선 완성된 논문을 당시 대학 재학 중인 우리 아이들과 애들 아빠에게 읽어 보게 한 후 가족들의 독후감을 들어 보았다. 내가 전혀 기대를 못 한 것은 아니지만 가족들이 한결같이 나의 논문이 전체적으로 한국식 영어로 쓰였기 때문에 글을 읽는 사람들의 어려움을 염려하고 있었다. 두 아이 중 어느 놈인가 이런 가혹한 말을 내게 했다. “엄마는 이민 1세이기 때문에 영어로 긴 논문을 쓸 경우 당연히 본의 아니게 문장 장애인(literary handicap)이 되는 것이지요”라고. 나는 이때 문득 주차장에서 보아온 장애인 주차장(handicap parking) 푯말이 머리에 떠올랐다. 그것이 아주 틀린 말은 아니겠지만 어찌 되었건 내가 여러 부류의 장애인 중 하나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대단히 좋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아주 큰 문제가 내 앞에 놓인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일이 있은 후 내가 아는 교수님으로부터 미스터 깁슨을 소개받게 되었다. 그가 옥스퍼드대를 나온 신학박사라고는 하지만 나이가 나보다 훨씬 아래 사람이다. 나는 그와 함께 나의 한국식 영어와 서툰 문장을 함께 교정할 때마다 내 마음은 마치 담임선생님께 잘못을 지적당하는 초등학생처럼 위축되어 있었고, 또 한편으로 한국식 영어는 모두 잘못된 것인 양 취급하는 깁슨 씨가 내 자존심을 조금씩 건드리고 있었다. 그날도 깁슨 씨를 찾아가 컴퓨터를 켜놓고 커다란 스크린에 나타난 문장 하나하나를 정리해가는 과정이 시작되었다. 왠지 그날따라 깁슨 박사 표정이 퍽 어둡다고 느꼈다.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기분이 언짢아 보이네요”라고 내가 물어보는데 그가 서둘러서 손수건을 꺼내어 눈물을 닦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아버님이 며칠 전에 세상을 떠나셨어요”라고 대답했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시카고서 약 4시간 떨어진 인디애나주 포트웨인에 사셨는데 영국 유학에서 돌아와서도 자주 찾아가 보지 못하고 지내다 며칠 전에 찾아가 뵈니까라며 말끝을 흐렸다. 그의 슬퍼하는 모습을 보는 순간 나는 그때까지 초라했던 초등학교 학생인 내 모습에서 벗어나서 그를 위로해야 하는 손 위에 어른으로 변모하면서 급히 머리를 써가면서 그의 슬픔을 위로할 말을 찾아내고 있었다. 잠시 후 마음을 가다듬고 나는 깁슨 박사에게 이런 위로의 말을 해 줄 수 있었다. “슬퍼하지 마세요. 깁슨 씨, 그래도 당신은 효자입니다. 당신 형님은 아버님 임종하시는 자리에 오지 못했다는데 당신은 시종 아버님 곁에서 임종을 지켜보았다고 하니까 효자 중의 효자지요.” 그때 깁슨 씨의 눈빛이 달라지는 걸 볼 수 있었다. 놀란 표정으로 나를 주시하며 “지금 뭐라고 말 했지요? 효자? 효자가 무슨 말입니까?”라고 했다. “아, 그건 한국어입니다. 우리 한국 문화는 부모 밑에 있는 여러 자식 중에서 특별히 부모를 잘 공경하고 돌보는 자식을 효자라고 하지요. 특별히 부모님 임종 시에 그 자리에 와서 임종을 지켜본 자식이야말로 그중 으뜸가는 효자로 친답니다.” 이 말을 듣던 미스터 깁슨의 얼굴에 안도의 화색이 돌며 입가에 미소를 짓는 것이 보였다. 그날 나와 깁슨 박사가 나눈 대화를 돌이켜 생각해 보면서 아버지를 잃고 깊은 슬픔에 싸인 깁슨 박사와 논문 교정을 받느라고 심기가 잔뜩 구겨지고 불편한 나, 이 두 사람의 무거운 가슴을 단번에 치유해준 그 아름다운 말 한마디 “당신은 효자입니다.” 이 한국말 한 마디가 마술처럼 매력 있고 아름답게 머리에 떠올랐다. 황진수 / 수필가삶의 뜨락에서 효자 효자 효자가 깁슨 박사 미스터 깁슨